일상

아버지의 뒷모습

달리는 동글이 2024. 11. 26. 18:52
반응형

주말에 아버지 생신이라 대구에 다녀왔습니다. 보통 와이프 애들까지 같이 다녀오는데 다들 시험과 마라톤 참가등 일이 겹쳐서 혼자 다녀왔습니다. 혼자라 기차를 타고 다녀왔습니다. 기차를 탈 때마다 떠오르는 산문이 있습니다. 중학교 때 국어교과서에 실려 있던 주쯔칭의 '아버지의 뒷모습(背影)이라는 산문(散文)입니다.

 

작가가 북경대 다니던 20살 시절에 아버지와 기차역에서 이별하는 순간을 묘사한 산문입니다. 중학생이던 시절 국어책에서 이 글을 읽고 얼마나 여운이 남았는지 아직도 기차역에만 들어서면 이 작품이 생각납니다. 아니 까맣게 잊고 지내다 나도 아버지가 되다 보니 다시 그 여운이 다시 살아난 것 같기도 합니다.

 

편부가정에서 조모와 함께 외롭고 힘들게 자라난 작가는 북경대에 다니게 됩니다. 똑똑하고 세련된 도시청년으로 성장한 작가는 오랜만에 아버지와 며칠을 지내게 됩니다. 작가의 눈에는 아버지는 촌스럽고 불쌍한 세상물정 모르는 촌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눈에는 작가는 그저 귀엽고 안심이 안 되는 어린애로 보일 뿐입니다. 아들을 위해 짐꾼을 불러 아들의 짐을 기차에 실어주고 어린애를 대하듯 걱정스럽게 아들에게 이것저것 당부를 합니다. 그리고 동행하는 심부름꾼에게 아들을 잘 보살펴 줄 것을 부탁합니다. 작가는 속으로 아버지의 이러한 행동을 비웃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귤을 사주기 위해 노점상이 있는 건너편 플랫폼으르 갑니다. 건너편의 플랫폼으로 가려면 철길을 건너야 하고 플랫폼의 벽을 오르내려야 해서 뚱뚱한 아버지가 갔다 오기엔 쉬운 일이 아닌 듯 보입니다.  그래서 작가가 가려고 하였으나 아버지는 굳이 당신께서 가겠다고 하십니다.  검은색 모자를 쓰고, 검은색 마고자에 남색무명 두루마기를 입으신 아버지가 뒤뚱뒤뚱 철길 위를 걸어가서  허리를 굽히고 플랫폼을 내려가는 모습은 그리 힘들어 보이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건너편 플랫폼의 벽을 기어오르실 때의 모습은 무척 힘들어 보입니다. 아버지는 두 손으로 플랫폼 벽 윗면의 바닥을 잡고서 두 다리를 위를 향해 올리시며 기어오르셨습니다. 아버지가 중심을 잃고 뚱뚱한 몸이 왼쪽으로 약간 기울어지자 애쓰시는 모습이 역력해 보였을 때, 작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았고 그 순간 작가의 눈에는 순식간에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작가 주쯔칭은 그 상황을 건조하게 묘사하면서도 한 편의 흑백영화처럼 아련하게 그려냅니다. 중학생이던 나는 국어시간에 이 글을 읽고 이 세상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아버지의 사랑을 느꼈습니다. 그 아련함이 가슴속에 남아서 아직도 기차역에만 가면 이 산문이 떠오릅니다.

 

 

 

 

저에게도 기억나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했을 때 아버지가 기숙사에 데려다주셨습니다. 책과 이불, 옷가지등을 기숙사에 옮겨주시고 대구로 내려가셨습니다. 전철역까지 배웅해 드렸는데 지하철역 지하상가 신발가게로 가시더니 기숙사에서 신을 슬리퍼를 한 켤레 사서 주셨습니다. 그러시고는 용돈을 주머니에 찔러주시고  "공부 열심히 해라"  " 나 간다" 하시고는 바로 대구로 가셨습니다. 그 뒷모습은 굉장히 컸고 성벽처럼 튼튼해 보였습니다.

 

 

논산훈련소 입소식 충청투데이

 

대학 2학년을 마치고 논산훈련소에 입소할 때 아버지는 어머니와 같이 저를 논산훈련소에 데려다주셨습니다. 훈련소 운동장에서 보호자들은 이제 돌아가주시라는 안내 방송에 저한테 "건강하게 군생활 잘해라" 하시고 돌아서는 아버지의 뒷모습은 내가 그전까지 보던 아버지의 뒷모습은 그전보다 많이 작았습니다.  내가 커가는 만큼 아버지는 작아지셨습니다. 자녀는 부모님을 영혼을 먹고 자라는 것 같습니다.

 

 

졸업 후 취직을 했는데 첫 발령지가 대구였습니다.  그래서 본가에서 첫 직장을 다녔습니다. 거기서 결혼을 하고 첫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들이 커서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부터 아들은 할아버지의 단짝 친구가 되었습니다.

 

할아버지가 가는 헬스클럽에 따라가고 동네 뒷산으로 같이 등산을 하고 목욕탕도 따라가고 할아버지와 손자는 친구처럼 붙어 다녔습니다. 아들이 5살이 됐을 때 제가 서울로 발령이 났습니다. 저와 집사람과 손자가 서울로 이사 가는 날 아버지는 "조심해서 가라"하시고 뒤돌아서서 집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우리가 떠나는 뒷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전 그때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아들을 군대 갈 때도 덤덤하셨던 아버지가 손자와의 이별에는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어느덧 그 손자는 올해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눈에는 아직 다섯 살 꼬마로 보이는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 모든 것이 변해도 손자에 대한 할아버지의 사랑은 변함없이 아련합니다. 이번에도 손주 주라며 용돈을 주십니다. 

 

 

팔순이 훨씬 넘으신 아버지는 뵐 때마다 주름은 더 깊게 파이고 더 작아지십니다. 아버지가 더 작아지셔서 세월의 강 너머로 사라지시기 전에 자주 찾아뵈야겠습니다. 오늘은 바람이 유난히 많이 붑니다.

 

 

 

 

 

 

반응형